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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국 전통 음악의 역사 (상고 시대 음악, 삼국 시대 음악, 고려, 조선 시대 음악,근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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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음악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거문고

상고시대의 음악

순박하고도 명량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즐겼습니다. 모든 나라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고대 음악도 종교음악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삼한의 음악

남쪾의 마한에서는 5월 씨부리기를 마친 때와 10월 추수가 끝난 뒤에는 크게 제사를 지내고 한데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와 춤을 즐겼습니다. 한편, 그 당시에 변한과 진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로 생각되는 슬이라는 현악기가 있었습니다.

부여, 고구려, 동예의 음악

씨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이면 제천ㄴ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으로써 즐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즉, 부여에서는 12월 영고, 고구려는 10월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은 백성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집단적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의 많은 악기 그림을 보면 그때도 악기가 발달했으며, 중국과의 음악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국시대의 음악

이 때에는 중국 고의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과 서역 지방의 음악이 많이 들어오게 되어 굉장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는 특히 대륙과 인접해 있어서 모든 문물 교류가 빈번했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중국은 물론, 멀리 서역에까지 교류하여 삼국 중 제일 화려한 음악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수와 다의 궁정에 있는 고구려 음악 악단까지 두게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악기와 음악을 전하였습니다. 특히 재상이었던 왕산악이 중국에 칠현금을 본떠 우리 음악에 맞는 거문고를 제작하여 많은 음악을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제의 음악

백제 음악은 이미 5~6세기 무렵 중국의 남송과 북위 등에 소개되었습니다. 또 몇몇 음악가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과 춤을 가르쳤고, 미마지는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면무를 일본에 전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도 전해지는 산대도감 놀이의 일종입니다. 악기는 고, 각, 우, 쟁, 피리 등이 사용되었으며, <정읍사>라는 유명한 가요를 남겼습니다.

신라의 음악

통일 전: 가야국의 우륵을 받아들여 가야금으로 대표할 수 있을 만큼 가야금과 춤이 성하였으며,악기는 일본에까지 전해졌습니다.

통일 후: 중앙에 음악을 곤장하는 기관의 음성서를 설치하여 악사를 양성하고 악곡을 이습시켰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화랑 제도에서 음악을 교양에 필요한 과목으로 삼아서 음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가 국교로 되면서 범패가 성했고, 악기는 삼현 삼죽 외에 박판, 대고, 장구, 당비파, 퉁소, 공후 등 풍부하고 악곡도 다양해졌습니다. 특히 처용가와 처용무, 검무, 범패 등은 이 시대에 연원을 두는 것들입니다.

 

고려, 조전 시대의 음악

고려 시대의 음악

고려에 와서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음악을 계승하여 더욱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즉 연등회,팔관회의 거국적 행사의 대규모 음악이 그것이며, 궁중의 연회악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아악, 당악, 향악 등 음악의 종류가 생겨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과 송에서 받아들인 음악은 원래의 우리 음악과 달라 서로 구별이 되었는데, 본래부터 내려오던 음악을 향학, 그리고 당과 송에서 받아들인 음악을 당악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송나라의 음악인 대성 악이 들어왔는데 이 음악을 아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연주되어 당악 가운데 보허자, 낙양춘은 지금까지 연주됩니다. 가악도 발달하여 사모곡, 서경별곡, 쌍화 곡, 청산별곡, 동동 등의 노래가 시조와 더불어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고려조는 악기도 양과 질에 있어서 손색없는 관현악이 이루어졌고 음악과 무용이 감상을 위한 것으로  체제가 정연하게 예술로 승화된 때입니다.

 

조선전기음악

고려 시대부터 있던 음악 기관인 전악서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아악서에서 국가의 음악행사를 주관하다가 이 둘은 후에 장악 서로 합쳐졌습니다. 세종 때 박연이 중심이 되어 아악을 정리하였으며, 아악에 필요한 악기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했는데, 이 기보법은 그 이전까지의 악보가 음의 길이를 표시하는 데 매우 미흡했던 점을 보완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종 때에는 악학궤범이 만들어졌는데 이 책은 성현, 신말평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으로 음의 원리와 방법, 악기, 의식에 관련된 도구, 무용 등 다방면에 걸친 음악 제도를 정리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음악

세종, 성종 때 크게 발전한 아악은 연산군의 폭정과 임진왜란 등의 수난기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예종에 이르러 부흥의 기운이 일어나 가곡, 가사, 시조 , 판소리 등의 성악과 산조, 시나위 등의 기악이 새로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든 민속악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체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악과 일반 서민층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민속악이 번성해져서, 우리 음악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점도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근세 음악

1894년에 봉건 사회 조직과 문물제도를 서양 방식으로 고친 갑오개혁 이후의 음악을 편의상 근세의 음악이라고 합니다.

 

광복 전의 음악

19세기 말경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전통 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구 사상 및 서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며 서양음악이 크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통 음악은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보급한 찬송가는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시초였으며 ,1900년에 창설된 서양식 군악대는 우리 나라에 서양 음악을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양 음악의 본격적인 음악은 1885년 배재 학당, 1886년 이화 하당으로 시작하여 1910년 이화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생기며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광복 후의 음악 

1960년대 들어서 전통 음악 문화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민족적인 자각과 국악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전통 음악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 국립 국악원이 설립되어 전통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준비를 했으며, 1954년에 국립 국악원에 국악사 양성 속 설립됨으로써 본격적인 국악 전문인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덕성 여대에 국악과가 설치되는 한편 1969년에 서울 대학교에 국악과가 신설되어 국악 교육의 기반이 점차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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